생각을 끊겠다는 마음까지 내려놓기
무념의 공부는 완전한 깨달음의 경계를 다룹니다. 아직 그 경계에 이르지 못한 수행자에게도 배울 것은 있습니다. 다만 큰 주제를 이야기하는 동안 실제 공부는 하지 못하고 글과 말만 남는 위험을 살펴야 합니다. 이 공부를 통해 삶의 지혜를 조금이라도 얻고, 깨달음의 경계를 함께 살펴볼 수 있다면 그만큼의 의미가 있습니다.
무념의 법을 온전히 깨닫는다는 것은 만 가지 현상에 두루 통하고, 모든 부처님의 경계를 보며, 부처의 지위에 이르는 일입니다. 이것은 완전한 깨달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잠깐 생각이 잦아들거나 마음이 고요해진 경험을 곧바로 그 경계와 같다고 여겨서는 안 됩니다.
일상에서는 생각이 너무 많아 그 흐름이 좀처럼 끊어지지 않습니다. 생각이 이어지면서 마음은 복잡해지고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번뇌와 망상에 얽히면 집중하기도 어렵고 수행하기도 어렵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잘 다스리고 번뇌를 닦아 없애며 본성을 찾으려는 노력을 하게 됩니다.
그 노력은 깊고 어려운 공부입니다. 아주 미세한 번뇌와 망상까지 남김없이 없애야 한다고 여기며 힘을 쏟습니다. 그러나 애써 수행한 뒤 모든 생각이 끊어졌다고 착각할 수도 있습니다. 돌아서서 삶을 살아가다 보면, 사라진 줄 알았던 망상이 아주 깊고 미세한 곳에서 다시 나타나기도 합니다. 때로는 그것이 강하게 되살아납니다. 수행의 어려움은 여기에 있습니다.
육조 스님의 무념은 생각을 끊겠다는 의지 자체까지 내려놓는 데로 나아갑니다. 내 마음을 잘 다스려야 한다는 생각, 번뇌와 망상을 반드시 없애야 한다는 생각에도 붙들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생각을 없애려는 마음까지 내려놓는 무념은 만 가지 현상에 걸림이 없는 경계입니다.
허공을 동서남북과 위아래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방향을 나누는 개념을 내려놓으면, 그 구분에 매이지 않는 허공이 있습니다. 무념도 이와 같이 살펴볼 수 있습니다. 분별과 시비,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으로 나누어 놓은 개념에 붙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 경계에서는 나와 현상을 따로 세워 놓고 바라보는 구분도 내려놓습니다. 자연의 어떤 현상과도 하나가 되어, 따로 떨어진 나를 고집하지 않습니다. 무엇이 있다거나 없다는 개념에도 매이지 않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머릿속 생각을 잠시 멈추는 것보다 훨씬 깊은 깨달음의 이야기입니다.
나와 너, 나와 대상의 구분을 남김없이 내려놓으면 모든 것을 보는 자리가 달라집니다. 산과 대지에 부처 아닌 것이 없고,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작용 또한 부처의 일입니다. 무심은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아무 작용도 하지 않는 상태로 끝나지 않습니다. 구분에 붙들리던 자리가 내려놓아지면서 모든 것이 다시 드러납니다.
허공 안에 나를 따로 세워 놓는 방식으로는 이 뜻을 다 담기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허공을 하나의 실체처럼 붙잡아서도 안 됩니다. 내가 사라지고 자연과 하나가 된다는 뜻 역시, 나와 자연을 나누어 고집하던 자리에서 벗어나는 일로 살펴야 합니다.
우리는 보통 좋고 나쁨, 귀하고 귀하지 않음, 쓸모 있음과 없음, 비쌈과 쌈으로 세상을 봅니다. 그런 분별에 붙들린 눈이 내려놓아지면 모든 것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다시 보입니다. 산은 산으로, 물은 물로 보입니다. 나의 판단으로 나누던 마음을 내려놓은 자리에서 산과 물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생각이 많아 마음이 복잡해질 때, 번뇌에 얽혀 있는 마음과 그것을 반드시 없애야 한다고 붙드는 마음을 함께 살펴봅니다. 마음을 다스리는 공부를 하면서도, 생각을 끊겠다는 의지 자체에 매여 있지는 않은지 돌아봅니다.
사람과 사물을 만날 때 좋고 나쁨, 쓸모 있음과 없음으로 먼저 나누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봅니다. 그 분별에 붙드는 마음을 내려놓는 공부를 일상에서 이어갑니다. 잠깐 고요해졌다는 이유로 깨달았다고 단정하지 않고, 다시 일어나는 번뇌까지 살피며 배움을 계속합니다.
무념은 완전한 깨달음의 경계를 다루는 공부입니다. 아직 그 경계에 이르지 못했더라도 삶의 지혜를 배울 수 있습니다. 다만 큰 이야기가 실제 수행 없이 말과 글로만 남지 않도록 살펴야 합니다.
번뇌와 망상을 다스리려 애쓰다 보면 모든 생각이 사라졌다고 여길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삶 속에서 미세한 번뇌가 다시 나타나기도 합니다. 잠깐의 고요함을 완전한 깨달음으로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육조 스님의 무념은 생각을 끊겠다는 의지 자체까지 내려놓는 데로 나아갑니다. 좋고 나쁨과 나와 대상의 구분에 붙들리지 않을 때, 모든 것이 그대로 다시 드러납니다. 산은 산으로, 물은 물로 보입니다. 오늘은 생각을 없애려는 마음에도 매여 있지는 않은지 살펴봅니다.
- 허공을 동서남북과 위아래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 생각을 끊겠다는 의지 자체에 매여 있지는 않은지 돌아봅니다.
- 방향을 나누는 개념을 내려놓으면 구분에 매이지 않는 허공이 있습니다.
- 모든 것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다시 보입니다.
- 잠깐 고요해졌다는 이유로 깨달았다고 단정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