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무명까지 비추는 수행
《대승기신론》에서는 마음이 흔들리는 과정을 삼세와 육추라는 말로 설명합니다. 말은 어렵지만 수행으로 옮기면 뜻은 분명합니다. 밖으로 드러난 말과 행동, 집착과 분별은 비교적 거친 흐름입니다. 이것을 알아차리고 다스리는 공부가 먼저 필요합니다.
칠지에 이르면 거친 번뇌와 분별의 흐름이 크게 소멸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거기서 곧바로 원만한 깨달음이 완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물결이 잦아들어도 물속 깊은 곳에 아주 미세한 움직임이 남아 있듯, 마음의 가장 깊은 습관은 더 섬세한 지혜로 비추어야 합니다.
삼세라고 부르는 미세한 무명 작용은 쉽게 보이지 않습니다. 내가 안다고 여기는 마음, 본다고 여기는 마음, 대상을 세워 붙드는 마음이 아주 가늘게 이어집니다. 수행자는 거친 번뇌가 줄었다고 자만하지 말고, 아직 남아 있는 미세한 그림자를 정직하게 살펴야 합니다.
금강유정은 금강처럼 흔들리지 않는 선정으로 마지막 무명까지 깨뜨리는 자리를 가리킵니다. 이것은 어떤 신비한 장면을 상상하라는 말이 아니라, 한 점의 미세한 집착도 자기 것이라고 붙들지 않는 깊은 깨어 있음의 비유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공부는 멀리 있는 높은 지위를 생각하며 마음을 꾸미는 데 있지 않습니다. 지금 내 안에서 거칠게 드러나는 반응을 보고, 그 아래 더 미세하게 숨어 있는 판단과 붙듦까지 살피는 데 있습니다. 거친 물결을 잠재우고, 깊은 물속의 움직임까지 비출 때 수행은 한 걸음 더 깊어집니다.
깨달음의 길은 시작과 끝을 가볍게 말할 수 있는 길이 아닙니다. 견성은 귀한 시작이지만, 마지막 무명의 그림자까지 사라지는 데에는 끝까지 깨어 있는 정진이 필요합니다. 오늘은 마음이 고요해졌다고 방심하지 말고, 그 고요함 속에서도 아직 남아 있는 미세한 붙듦을 살펴보십시오.
수행은 거친 번뇌를 다스리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마음이 고요해진 뒤에도 미세한 판단과 붙듦이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마지막 무명의 그림자까지 비추는 정진이 깊은 깨달음으로 이어집니다.